<REVIEW>
발상의 전환을 통한 가상의 풍경
권주희(스튜디오126 대표/독립기획자)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해 보면,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는 시점은 기존에 주류라고 여겨졌던 관념이나 화풍이 새로운 세력에 의해 와해될 때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각광을 받는 인상주의 화파도 당시 미술계의 흐름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하나의 흐름이었다.
현대미술계는 문화적인 코드가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과거의 흐름처럼 하나의 큰 줄기로 파악할 수 없다. 파노프스키가 예술 작품의 의미를 해석할 때, 첫 단계로 규정한 것은 문화적 관습에 의한 참조 없이 시각적 모티브를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었다. 정재훈의 작업도 단순한 시각적 모티브를 기반으로 하며 연상법을 상기시킨다. 어린이들의 끝말잇기, 창의적인 아이템을 도출해 내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은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활용된다. 작가는 단편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이상의 사물 혹은 자연물의 연결 지점을 패턴으로 도출해 내고 거기에 상상을 더해 가상의 풍경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내포한 의미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대상 자체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고, 사실상 사물이 작품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면, 그 의미를 해석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은 문화적 관습으로부터 비롯된 일종의 강박과도 같으며 다른 요소들과의 결합을 통해 활성화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관습을 역으로 돌파하고 자연물이나 사물과 같은 대상 자체에 주목한다. 일상과 주변의 것들을 간과하지 않고 근원에 대해 사유하거나 다각적으로 해석해 본다.
정재훈의 작업을 마주할 때면, 익숙하면서도 낯선 인상을 받는다. 작가는 스스로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개념을 언급한다. 작업에서 익숙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소재이기 때문이고,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실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조합이므로 초현실주의와 연결된다. 화면에서 보여지는 픽셀의 구성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감은 디지털이나 온라인 게임의 배경처럼 우리에게 자주 노출된 장면을 연상시킨다. 컴퓨터 그래픽이 보편화되기 전 그래픽 디자인을 위해 사용했던 에어브러시를 사용한다는 점도 이를 보충한다. 신선한 지점은 주로 자연에서 생성된 패턴을 매개로 다른 대상과의 교차점을 도출해 내는데, 결합의 순간에는 풍화작용을 일으키며 사라질 듯, 혹은 무언가 새로운 대상으로 탄생할 것 같은 상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편, 이미지는 말과 글보다는 더욱 원시적이고 순수한 경향을 지니고 있어 때때로 자연적인 기호로 해석되는데, 그의 작업에서도 시각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간결한 텍스트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작가의 작업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신선하고 새롭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득되지 않는 묘한 감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의 스토리를 배제한 시각적인 형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물의 이면을 관찰할 수 있는 식견과 진부한 것들을 전복시키는 독특한 발상은 1차적으로 즐거운 상상을 전달한다. 하지만 작가가 작업을 매개로 관람자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여된다면, 소통의 범위 또한 축소될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고수하는 형식에 대해 진지한 연구와 탐색의 시간이 요구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스스로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설득할만한 충분한 논리가 수반되어야 한다.
나태주 시인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풀꽃을 관찰해 시를 지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간결한 내용의 시(詩)지만 우리 주변 존재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신에게도 똑같은 애정과 관심으로 대하기를 권유한다. 정재훈 작가가 대상 자체의 근원을 탐구하고 관찰하며 재해석하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과도 깊은 교감으로 형상 너머의 의미를 발견하고 연구하여 타인과도 더욱 내밀한 소통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